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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주식

아파트값 5차 파동 - 3차 파동 정리

by 잘봄 2022.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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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말아 먹기

- 사기꾼들이 외곽 잠잠하던 동네 땅을 매입하고, 서로 돌려가며 가격을 올리면서, 개발 계획을 흘리면... 시세를 관찰하던 외지 투기꾼, 복덕방을 기웃하던 동네 주민, 아마추어 투자자가 상투를 잡는다... ㅠㅠ

 

해약 붙이기

 

 

되돌려 치기

 

 

약효가 빠를수록 부작용도 크다

79년 1월, 수요 감소, 공급과잉 현산이 나타나 전세값이 집값의 25%선까지 떨어지기도 했는데, 그만큼 집값을 밀어올리는 시장에너지가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 주거환경과 학군이 좋은 여의도 지역을 제외한 모든 아파트값이 하락세를 보였지만 그렇다고 크게 떨어지진 않았다. 물가가 꾸준히 오르고 있어 집값 하락 버팀목 역할을 했다. 그래서 집값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요요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 집값이 제법 떨어졌으나 감히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없었다. 살 사람은 값이 더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눈치였으나 집주인은 세금이 무서워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팔려고 하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세금을 내고 부동산 거래를 한다는 것은 거의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양도세율이 워낙 높아 매매차익의 거의 전부를 세금으로 내야만 했다.

* 황새와 뱁새의 걸음걸이 만큼 소득수준에 비해 아파트값이 저만치 앞서가 내 집 마련 수요자들이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인기지역을 조금만 벗어나도 분양이 잘 안됐다. 한강변 일대에서만 수요가 맴돌았고 지명도가 높은 주택건설업체에 대한 집중도 즉 '브랜드파워'가 점점 커졌다. 따라서 차별화와 양극화가 이뤄졌는데 위치가 좋고 믿을만한 주택업체가 지은 아파트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매기가 없었다.

* 주택경기가 침체될수록 주택품질은 좋아지게 된다.

* 또 한가지 변화는 여의도에서 아파트가 분양되면서 학군이 아파트 선택 기준에 포함되었다.

 

 

5일 춘몽

79년 3월, 주택건설 이정표 역할을 하는 분양률도 갈수록 낮아져 50%를 밑돌았다. 미분양아파트가 반년 만에 8천여 가구가 쌓여 주택건설업체들이 자금난에 시달렸다. 사업계획을 축소해야만 했다. 이처럼 주택공급에  차질을 빚을 우려가 있자 숨통을 어느 정도 열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정부가 조심스럽게 한번 당첨되면 3년 동안 신청할 수 없는 아파트 재당첨 금지 규정을 폐지하였다. → 복부인들이 잽싸게 미분양아파트를 무더리로 사들였다. → 곳곳에서 투기조짐이 포착되자, 정부가 다시 강경해져 불과 닷새 만에 재당첨금지 규정의 폐지를 없던 일로 했다.

79년 7월, 실물경기 침체에 '2차 오일쇼크'로 인해서 국가경제가 휘청거렸다. 스테그플레이션(stagflation)이 또 다시 발생했다. 여의도만 가격을 겨우 유지하고, 나머지 지역은 20~30% 가량 떨어졌으나, 거래은 이뤄지지 않았다.

 

 

불황 속의 이변

80년 1월, 정부는 깊은 수렁에 빠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환율을 대폭 인상하고 금리도 연 24%로 올렸는데, 그렇지 않아도 석유값이 크게 올라 불안한 물가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 물가가 오르자, 아파트 분양가격도 20% 정도 인상 요인이 발생하였다. 오르는 물가에 환물심리로 인해서 내 집 마련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당황하여 서둘러 매입에 나섰고, 팔리기도 하고 매물을 거둬들이기도 하면서 서울 미분양 4천여 가구가 거의 다 팔렸다.

80년 3월, 기존 아파트값이 올라서, 분양가격이 통제되는 신축 아파트와의 가격 차이가 발생했다. 이로인해 분양시장으로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석 달도 못 가 광주민주항쟁운동이 일어나 정국이 불안해져 투자심리가 위축되었다.

80년 12월, 주택시장 거래가 끊기자 가격이 비슷한 부동산을 서로 바꿔치기 하는 변칙적인 거래방식이 등장했으나... 쉽지 않았다.

* 정부는 주택거래를 촉진하기 위해 양도세율과 과세 기준을 2차례에 걸쳐 대폭 완화하고, 한시적으로 탄력세율을 적용해 감면 해 주었으나... 주택시장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명절 증후군

81년 1월, 겨울방학 시기가 가장 이사를 많이 다니는 성수기이다. 여름은 열대야와 찜통 더위, 도시탈출 휴가 행렬로 비수기, 이 때 내 집 마련 수요자에게는 적기이다. 

* 주택경기는 계절에 따라 흐름을 타게 되고 집값은 매년 봄, 가을 이사철을 전후해 주기적으로 오르내리며 'M자형' 상승곡선을 그리게 된다.

* 세입자 보호를 위해 주택 임대기간을 1년으로 하도록 못박은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제정되었다. (6개월 → 1년)

* 분양가격 상한선은 매년 상승하여, 기존 주택가격과 비슷한 수준이 되었으나, 주택시장은 여전히 썰렁했다.

* 정부는 청약부금제도를 폐지하고, 국민주택 선매청약저축제도를 신설했다. 매달 정해진 금액을 꼬박꼬박 불입해야하는 청약부금과는 달리, 개인의 능력에 따라 매달 2만~10만 원 범위 내에서 저축할 수 있고, 저축액이 많은 사람에게 분양우선권을 주었다.

 

 

호재 불감증

81년 6월, 주택경기 활성화대책 발표, 투기억제지역 전면 해제, 소형주택 건설의무제도 폐지, 투기 아닌 투자에 대해 자금출처조사 하지 않음 → 주택시장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왜? 3년간 재당첨금지, 미등기전매 중과세, 1가구 1주택자도 6개월 이상 거주해야 양도세를 면제 받는 등 제약이 여전히 있었기 때문.

전용면적 25.7평 이상 아파트의 분양가격 자율화 실시 → 미분양 아파트가 쌓여있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음

81년 10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잠실을 포함한 서울 강동지역 올림픽타운 개발바람이 조용히 불었다. 

부족한 택지난을 해결하기 위해, 그린벨트를 풀어 개발 실시, 그 첫번째는 산자락을 끼고 있는 개포동 일대 자연녹지 2백41만평이 택지로 개발됨.

개포 주공아파트 1차 분양이 끝났을 때, 분양경쟁률은 매우 낮았고, '3차 파동'의 진원지가 되리라고 아무도 예상 못 했다.

집값 상승률이 은행 이자에도 못 미치 집을 사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 주택업체들이 틈새시장 개척. 고급 주택가 논현동과 청담동 자투리 땅에 고~~~급 '빌라(Villa)'를 지어 부유층의 사치스러운 취양을 자극하였다.

 

 

팡파레가 울렸다

82년 6월, 10회 이상의 주택경기 활성화대책을 마련했으나 여전히 주택경기가 살아나지 않았다.

* 주택경기를 활성화시켜 실물경기를 일으키고 싶은 정부는, 투기억제를 위한 제도적 안전장치를 하나 둘 제거함.

- 1가구 2주택 면세기한을 1년에서 1년6개월로 연장

- 공공주택 전매금지 기간을 2년에서 6개월로 단축

- 신축주택을 매입할 경우 양도세 대폭 완화

→ 정책효과는 별로 없었다.

사채시장에서 경제 지진이 일어나, 이를 수습하기 위해 돈을 풀고, 금리를 대폭 낮추었다. 은행금리는 연 8%로 낮아졌는데, 당시 주택임대 수익률은 월 3%로 X3배 였다. 월세를 받는 것이 유리해져, 전세를 월세로 전환하는 사례가 늘어났고, 전세물량이 부족해져 전세값이 크게 올랐다. 전세값이 집값을 따라붙자, 집값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수요자들이 많이 찾는 소형아파트와 전세값이 먼저 올랐다. 집값 상승을 선도한 곳은 마침 2차 주공아파트 분양하는 개포지구였다.

부동산 가격 상승이 지방으로 퍼지려는 움직임에, 국세청은 국민주택 전매행위에 대한 세무조사를 대폭 강화하고 미등기 전매와 투기를 부추기는 복덕방을 단속하였다. 국세청의 조치는 효과를 보여 아파트값이 한풀 꺾였다.

 

 

0순위 통장

82년 10월, 교통이 편리하고 학군이 좋은데다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된 개포지구에서 민영아파트가 분양되자 잠잠하던 주택시장이 다시 꿀렁거렸다. 분양가격과 기존 아파트가격 차이로 인해서 프리미엄이 형성되었다. 이로인해 '0순위 통장'에도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었다.

 

 

아파트값을 춤추게 한 마술사들

부동산 투기의 중심권에는 언제나 복부인을 등에 엎은 악덕 복덕방의 농간이 있었다.

아파트 투기는 서울 강남지역 몇몇 대형아파트에 집중되어 나타났고, 강북지역과 변두리 등 비인기 지역에서는 분양이 안 되 쩔쩔매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정부는 강력한 대책을 마련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정부가 경찰력을 투입해 악덕 복덕방 토벌작전에 나서자 아파트값 상승세는 꺾였지만 크게 내리지 않고 약보합세를 유지했다.

정부는 주택경기 활성화대책이 나온 지 불과 6개월 만에 투기억제대책을 발표해야만 했다.

- 골칫거리, 주택청약예금 0순위 제도 폐지

- 주택청약예금 1순위 자격을 가입 후 3개월에서 9개월로 변경

- 전체 공정이 10% 이상 됐을 때 분양하도록 조정

- 국민주택 전매금지 기간을 6개월에서 1년으로 연장

→ 투기억제대책으로 아파트 분양시장은 가라앉았으나, 지방 임야 시장에 불이 붙었다.

 

 

무책이 상책

83년 2월, 0순위 통장 거래가 실수요자들에 의해서도 이뤄지자, 정부는 청약예금통장의 전매차익에 양도소득세를 부과하였다. 불법행위를 합법화 시킴;

기대를 모았던 민간분양아파트의 분양을 연기시키고, 분양가격을 현실화하겠다고 발표하자, 분양 가격 상승에 대한 불안감이 잠재된 수요를 폭발시켜 아파트 가격에 불이 붙었다. '3차 파동'의 절정이었다.

 

 

제2의 분양가격, 채권입찰액

분양시장 투기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채권입찰제 도입.

주택시장 수요가 넘치는데 공급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서울 서부지역 안양천변 뚝방동네인 목동일대 1백32만평 개발에 나섰다.

83년 5월, 채권입찰제가 시험대에 올랐고, 효과가 있었다. 개포동 현대아파트 분양에서 채권매입액이 예상보다 낮았고, 계절적으로 비수기에 접어들어 아파트값이 내림세를 보였다. 뒤이어 분양한 압구정동, 가락동 한양아파트는 경쟁률이 낮았고, 일부 평형은 미달되기도 하였다.

* 돈 바람은 1년 동안 서울 강남지역 신축아파트 - 지방 임야 - 기존 아파트를 두루 거친 후 뒤늦게 단독주택값도 올려 놓았다. 땅값 상승 폭만큼 올라 아파트값과 균형을 맞추어 서울의 택지값은 상향 평준화되었다.

 

 

3막 3장, 정책파동

'3차 파동'은 실물경기가 불황권에 있을 때 발생한 '정책파동'이다. 어음사기 사건 수습을 위해 통화 공급, 금리 인하(1년6개월 만에 24%→8%), 금융실명제 시행 예고로 자산의 이동이 일어났다.

3차 파동은 1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아파트값이 올랐다.

첫 번째는 저금리 정책으로 투자심리가 되살아 나자 소형아파트와 전세값 동반 상승

두 번째는 개포지구 민영아파트가 분양될 때

세 번째는 분양가 현실화 방침을 발표한 때였다. 채권입찰제가 시행되고, 채권을 사는 만큼 아파트값이 오르기 때문에 잠재수요가 일시에 폭발해 임무 교대한 기존아파트가 전체 아파트값 상승을 주도하였다. 대부분의 기존 아파트값이 이 때 큰 폭으로 올랐다.

  지금까지 주택경기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물가상승에 따른 환물심리였다. 그런데 3차 파동은 분양가 현실화를 위한 채권입찰제 실시, 저금리 정책, 강남 8학군, 누적된 공급부족 등이 복합적으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아파트값을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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